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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속 통일이야기

은평의 역사

고려시대

태조(1335~1408)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태조 23년(940년), 한양군을 양주(楊州)로 고쳤고, 성종 2년에는 12목(牧)을 두어 양주목으로 승격시키고 그곳에 상주하는 장관인 목사(牧使)를 두었으며,
다시 성종 14년(995년), 전국에 10도 12주 절도사를 둘 때 서울을 10도중 관내도(關內道)로서 양주 절도사 관할에 속하도록 하였다. 다시 현종때 전국을 5도 양계로 나누었는데 서울은 양광도에 소속되었다.
문종(1414~1452)
문종때(1067년) 양주를 남경유수관으로 승격시켜 서경, 동경과 더불어 3소경이 되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지리도참사상에 근원을 둔 새 궁궐을 남경에 설치하였다.
그러나 남경을 설치한 후에도 나라에 큰 어려움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다시 양주로 격하하였다. 그러나 숙종때 다시 남경을 설치하였는데 그 까닭은 숙종이 어린 조카로부터 왕위를 빼앗다시피 하여
왕위에 오른데다가 가뭄과 큰 비와 우박이 내리는 등 여러 가지 이변이 일어나므로 ‘도선기’, ‘도선답사가’, ‘삼각산 명당기’, ‘신지비사’ 등을 인용한 김위제의 주장에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당시 남경 유수의 관할구역은 양주, 고양, 평택, 안성, 수원, 화성, 인천, 시흥, 안양, 부평, 강화, 포천, 파주 등이 해당된다. 예종때에는 임금이 네 차례에 걸쳐서 남경을 직접 다녀갔으며, 인종도 남경에 친행하였고,
그 후 의종 때에도 두 번이나 남경을 다녀갔다.
고종(1852~1919.1.21)
고종 때에는 임금의 의복을 남경에 보내서 가궐(假闕)에 안치케 하였으며 고려 태조의 신위를 개성의 수창궁에서 남경으로 옮겨 안치하기도 하였다.
어의안치는 3~5월은 남경궁궐에, 7~10월까지는 개성의 강안전에, 11월~이듬해 2월까지는 다시 남경에 안치하기도 하였다.
충렬왕((1236~1308)
충렬왕 때(1308년) 남경은 한양부로 개편되었고, 부윤(府尹)을 두었다. 공민왕 때 다시 일시적으로 남경이 되었다가 곧 한양부로 환원되었으며,
한때 한양으로 천도하기 위하여 궁궐을 짓기도 하였는데 이는 중 보우(普愚)가 도참설을 인용하여 공민왕에게 진언한 까닭이다.
우왕때에는 한양천도론이 활기를 띠었으나 최영의 반대로 중단되었다가 우왕 8년(1382년) 9월에 잠시 한양으로 천도하였으며, 이듬해 2월 개성으로 환도하였다.
공양왕 2년(1390년) 9월에도 한양으로 천도한 후 5개월만에 다시 개성으로 환도하였다.

고려말기

이처럼 고려 말기에는 왕조의 번창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두 번이나 한양천도를 단행하였으나 그에 따른 이로움을 얻지 못하였으며 기울어져 가는 혼미한 왕조를 돌이켜 세우지 못하고 1392년 그 막을 내렸다.
그러므로 고려의 서울 지배는 태봉국의 궁예 이후부터 497년간이었다. 그 밖에 봉원천, 모래내, 불광천 등의 유역이 농경지로서 본격적으로 개발되는 것이 바로 고려시대이다.

고려왕조는 중농정책을 국가의 기본적 경제 정책으로 삼아 농업국가로의 지향을 분명히 하였다. 은평구 지역도 그러한 중농정책에 힘입어 널리 개간되어갔고 생산력이 높은 지대로 주목되어 갔다.

더구나 이 지역은 한강하류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강의 수로를 이용하면 개경으로의 수확물의 운송도 매우 용이한 편이었다.
그것은 인근 지역 곳곳에 세곡 운송의 포구가 설치되어 있음에서 쉽게 입증된다. 그밖에도 은평구 지역에서는 밭농사도 행해졌다.
논농사에 비해 오히려 밭농사가 유리하였는데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의하면 고려에서는 산간 오지에도 계단을 이루며 전답이 개간되고 있다고 하였고,
특용작물의 재배도 성행하여 옷감과 종이는 그 품질이 우수하다고 하였다.

또한 고려시대에도 수도는 개경(開京)이었지만, 오늘의 서울을 남경, 그리고 신라의 서울이었던 경주를 동경으로 하여 중심도시로 육성하면서 개경에서 남경,동경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발달하였다.
행정체계가 정비되면서 역로가 이 길을 중심으로 건설되었다. 즉, 개경으로부터 장단, 파주, 교하, 고양,서울사이를 잇는 청교도(靑郊道)라는 역로망이 분포되어 있었는데,
그 길은 벽지, 영서, 평리, 상림, 단조, 청파에 이르고 있어 오늘의 의주로의 원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청교도에서 가평, 춘천으로 이어지는 춘주도(春州道), 양평,원주로 빠지는 평구도(平丘道), 광주, 이천, 충주로 이어지는
광주도(廣州道), 수원, 천안, 공주로 나가는 충청주도(忠淸州道) 등이 갈라져 개경에서 남쪽 방면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청교도를 경유해야 했기 때문에, 이 은평지역을 지나지 않고는 남쪽과의 교역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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