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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속 통일이야기

은평의 역사

조선시대

조선시대 태조 3년(1395년)에는 한양을 한성부(漢城府)라 개칭하여 나라의 수도로 삼고, 5부(部) 52방(坊)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었다가 세종 대(代)에는
49방으로 개편되었다. 한성부의 하급관아인 5부(지금의 구에 해당)는 중, 동, 서,남, 북부였으며, 현재의 은평(恩平)지역은 이때 북부(北部)에 속하게 되었고,
북부 중에 성외(城外)인 연은방(延恩坊)과 상평방(常平坊)에 해당된 곳이었다. 은평(恩平)이란 명칭은 바로 이 두 방의 이름에서 한 자씩을 따서 유래한 것이다.

조선시대 은평지역은 서대문 밖의 지역으로 경중오부(京中五部)에는 속하지 않았지만 성저십리(城底十里)라고 하여 한성부의 반송방(盤松坊)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구역은 당시 지방 도시로서는 매우 큰 곳이었던 개성, 평양과 통하는 교통의 길목이었고, 조선 왕조와 긴밀한 관계에 있던 중국으로
내왕하기 위해 출발하던 지점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다른 성저십리 지역과 달리 인가가 조밀했고, 사람들의 왕래가 분주하였다.

조선시대 은평구 지역은 현재 은평구, 마포구, 서대문구에 이르는 도성 서부의 광활한 면적을 아우르고 있었다. 따라서 오늘의 의주로(義州路) 연변을 제외하고는
전지역이 거의 개발되지 않고 자연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산악과 구릉으로 점철되어 있었고, 불광천, 모래내, 봉원천, 만초천 등이 구릉 사이를 흐르고 있어
그 연변에 부분적으로 농경지가 형성되고 있었을 뿐이었다. 서울 자체가 크고 작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였으며, 그 가운데서도 은평구 지역은 북한산,
도봉산에서 뻗어온 산맥의 능선이 서남쪽으로 갈라지면서 안산을 중심으로 인왕산, 백련산 등 세 개의 봉우리가 잔구의 형태로 솟아 있다.
따라서 능선이 곳곳에 돌출하여 취락의 입지로서는 그리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 구릉으로 이루어져 배수는 양호한 편이어서 주택지구로 개발될 가능성이 충분한
곳이었다. 다만, 기온 분포에 있어서는 북서풍에서 사면 하강 기류에 의한 냉기가 유입되어, 이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온도가 낮은 저온지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전근대 사회에서는 이 지역이 취락의 적합지대로서 선호되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은평지역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이 지역은 농경취락지로 변하였는데, 제한적이나마 농경취락이 가능했던 곳은 능선과 능선으로 감싸인 분지 또는 하천연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외곽으로 흐르고 있는 불광천은 북한산 비봉에서 발원하여 은평구의 대조동, 역촌동, 신사동을 끼고 남쪽으로 흐르다가 서대문구 북가좌동과 은평구 수색동의 경계를 이룬다.
모래내[沙川]는 홍제천이라고도 하는데, 종로구 평창동, 신영동, 홍지동을 지나 구부러져 백련산 동쪽을 감싸 돌면서 연희동과 홍은동, 남가좌동 사이를 통과해서 마포구 성산동에서 한강에 합류한다.
개천 연변이나 분지에는 하천이 범람하여 충적토 또는 퇴적토의 지질구조를 이루고 있어 비교적 토양의 비옥도가 높았고 교통의 길목으로 역할이 중요하였기 때문에 취락지로의 변화가 가능하였다.

교통의 길목으로서 은평구 지역의 중요성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확연히 드러났다.

정치, 군사적 의미에서 의주로를 지나는 도로의 위상이 크게 부각되었다. 조선 왕조는 중앙 집권 체제를 강력히 추구하여 전국에 대한 지배력을 서울을 중심으로 획일적으로 구사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집권체제의 수립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도로 정책이 특별히 요구되었다. 그것은 역참(驛站)의 구축으로 집약되었고, 전국의 도로망은 역참에 의해 형성되었다.

조선시대 특히 그 전기에 있어서의 역참은 사회, 경제적 의미보다는 정치, 군사적 측면에서 운영되었다. 즉, 역로는 국가의 신경조직에 비유되는바,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통치 집단이 지방에 명령을 하달하고 지방관이 중앙에 조세와 공물을 상납하며 또 변방에서의 불상사를 보고하는 정치, 군사적 의미에서 존재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외방으로 통하는 도로는 간선도로만 하여도 여럿이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서는 9개 노선을, 도로고(道路考)에서는 6개 노선을,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10개 노선을 주요 간선도로로 꼽고 있다. 

그 어느 책에서든지 제1로 꼽히는 도로가 한양에서 의주에 이르는 의주로였다.
의주로는 일반적 도로와 같이 정치,군사적으로 중요하였을 뿐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나아가 경제, 문화적으로도 그 의미가 매우 컸는데 이 도로는 사행로(使行路)로 개발되었던 것이다.

조선 왕조로서는 왕조의 기반을 굳히기 위해서도 대륙을 장악한 중국과의 안정적 관계가 절실했다.
고려 때도 중국과의 관계가 긴밀했지만, 당시 송나라의 중심지가 강남에 있었기 때문에 해로(海路)를 이용하였다.
고려 후기에 원이 중국을 지배하면서 개경에서 평양을 거쳐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는 길이 활성화되었다.
반면 조선 왕조가 교류한 중국의 명과 청은 줄곧 북경을 근거지로 하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육로가 이용되었고,
그리하여 한양에서 의주까지 가는 도로는 우리나라 외방도로 중에서 가장 발달하였다.
또한 거의 달마다 한번씩 대규모의 사행이 통과했는데 이로서 의주로의 번성함은 쉽게 예견되며, 실제로도 가장 정비된 도로였었다.

경기감영도의 부분 영온문근처

우리나라에서는 1년에 정기적 사행만 해도 4회, 그 밖에 수시로 임시사행이 파견되었으며, 중국에서도 그에 대응하여 사절을 보내왔다. 사행의 구성을 보면 정사, 부사, 서장관을 비롯하여 이에 딸린 인원이 300명정도였으며,
이들이 타고 가는 역마와 중국에 보내는 예물을 실은 짐바리 말, 여행 중에 필요한 식량 및 물품 등을 싣고 가는 말을 합하여 대략 200여 필이 동원되었다. 즉 거의 달마다 한번씩 이 같은 대규모의 사행이 통과했다고 할 때
의주로의 번성함은 쉽게 예견될 수 있다. 도로의 중요성이 제고되면서, 도로의 관리를 위해 또는 교통의 편의를 위해 의주로 일대에는 역로망이 구축되고 역(驛)과 원(院)의 시설이 정비되었다.

즉, 한양에서 개성에 이르는 의주로 연변에는 교통을 제공하는 연서역, 벽제역 등의 역과 여행자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는 홍제원, 덕수원 등의 원이 설치되었다. 
즉, 은평구 지역이 지형적으로 구릉으로 점철되었다고 하여도 교통의 중요한 길목으로서 의주로 향하는 길이 이 지역을 관통하고 있어서 일부 지역은 조선시대에 이미 택지화되고 인구가 밀집되고 있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 서울로의 인구 집중이 심화되면서, 도성 안으로 진입할 수 없었던 유민들은 현재의 서대문구와 은평구 등 서대문 밖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정착하여 갔다. 그리하여 점차 이 지역의 취락 공간도 확대되어 갔다.

조선 초기 이 지역에 한성부의 성저십리로 설치되었던 반송방의 범위는 그리 넓지 않았던 것 같다. 정확한 구역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무악재와 아현을 경계로 그 이내 지역이 관할 구역이었다고 본다.
그 밖의 지역에는 지방의 경우와 같이 면을 두었는데 연희면과 오늘날 은평구인 연은면에 설치되었다고 추정된다. 조선시대 이들 면 지역은 한성부 구역에 속하면서도 사산금표제(四山禁標制)를 실시하여 처음부터
개발이 제한되고 있었다. 즉, 조선왕조는 한양을 둘러싼 거의 모든 산에 출입을 금지하는 금표(禁標)를 세워 이들 구역에서의 건축, 경작, 벌목을 금했을 뿐 아니라 나무뿌리나 흙과 돌의 채취도 엄금하였다.
이를테면 자연 보호를 위해 그린벨트를 설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지역에는 숲이 무성했고, 사람들이 거의 거주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현상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크게 달라졌다. 사산금표제의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7세기 후반이래 흉년이 계속되고 농촌사회가 분해되면서 전국의 유민들이 서울로 몰려드는 것이 연례행사처럼 되었으며,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울집중현상은 19세기에도 계속되었고 이들은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대부분 서울에 정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 벌써 도성 앞에는 인구가 조밀하여 택지의 여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반송방(盤松坊)과 반석방(盤石坊) 등지에 택지를 마련해 주고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이들 반송방과 같은 성저십리의 주거지도 한계에 이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유민들은 금표 지역안의 면 지역까지도 침입하여 벌목하고 집을 지었다. 그리하여 1746년(영조 22년)에는 만리재, 서빙고를 비롯한
성저의 여러 산들이 개간되고 있었는데 18세기 후반에는 산허리 이상의 개간이 보편화되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은평구 지역

조선시대 이 지역의 인구가 증대하면서 지역의 공간도 확대되어 갔다. 그리하여 1727년(영조 3년)에는 백련산의 능선이
연희동을 감싸는 선으로 정해졌던 종래의 성저십리 구역을 주민들의 요청으로 모래내에까지 확장시켰다.
그리고 이 지역을 정식으로 한성부로 하여금 관할케 하기 위하여 연희방, 연은방, 상평방을 설치했다. 
이 지역의 가호와 인구는 그 이전부터 한성부가 면으로서 관장하고 있었지만 이제 행정 편제인 방(坊)을 신설하여 이 지역에
대한 행정 관리를 강화한 것이다. 행정 편제가 정비된 당시 서대문구 지역의 범주는 오늘의 서대문구 전역과 은평구 전역이 포함되어 있었다. 

현재 이들 지역 중에서 반송방의 일부는 종로구로, 연희방의 일부는 은평구ㆍ마포구 구역으로 그리고 연은방은 대부분 은평구 구역으로 편입되었다.

방 (坊)명 해당구역(현재의 행정동명)
<표 1-6> 조선후기 서대문 밖 지연 일대의 행정 편제
반송방(盤松坊) 충정로동, 천연동, 냉천동, 현저동, 옥천동, 무악동, 행촌동, 홍파동, 송월동, 평동, 교남동, 교북동
연희방(延禧坊) 북아현동, 대현동, 대신동, 봉원동, 신촌동, 창천동, 연희동, 북가좌동, 남가좌동, 성산동, 중동, 수색동, 노고산동, 망원동, 증산동, 합정동, 동교동, 서교동, 상암동
연은방(延恩坊) 홍제동, 홍은동, 녹번동, 응암동, 신사동, 구산동, 역촌동, 대조동, 갈현동, 불광동, 진관동, 구파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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